경험의 흔적 - [인식과 의식, 그리고 행동]


경험은 인식의 바탕이 된다

사람은 처음부터 빈 눈으로 세계를 보지 않는다. 그는 지나온 경험을 가지고 현실을 본다. 과거에 겪은 사건, 반복해서 만난 사람, 성공과 실패의 기억, 상처와 인정의 흔적이 모두 현재의 인식에 작용한다.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의 형태로 남고 감정의 형태로 남으며 판단의 습관으로 남는다. 그래서 인간의 인식은 언제나 경험 위에서 이루어진다.

경험은 세계를 이해하게 해준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 앞에서 사람은 쉽게 혼란스러워진다. 반면에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경험한 사람은 빠르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떤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말 뒤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어떤 상황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경험은 인식을 돕는 자산이다. 그러나 경험은 동시에 인식을 가두는 틀이 될 수 있다.

경험은 현실을 빠르게 해석하게 한다

경험이 쌓이면 사람은 현실을 빠르게 해석한다. 과거의 사례와 현재의 상황을 연결하고, 이전에 배운 의미를 현재에 적용한다. 이 빠른 해석은 실제 삶에서 필요하다. 사람은 매번 모든 상황을 처음부터 분석할 수 없다. 경험은 판단의 시간을 줄이고 행동의 방향을 빠르게 잡게 한다. 경험 많은 사람의 직관은 대개 이러한 축적에서 나온다.

그러나 빠른 해석은 위험도 가진다. 현재의 상황이 과거와 비슷해 보여도 실제로는 다를 수 있다. 이전에 실패했던 방식이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고, 이전에 신뢰했던 신호가 이번에는 잘못된 신호일 수 있다. 경험이 유사성을 찾아내지만 차이를 놓치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경험에 의해 빨라진 인식은 편리하지만 그만큼 성찰을 필요로 한다.

상처는 인식의 방향을 바꾼다

모든 경험이 같은 무게로 남지는 않는다. 어떤 경험은 특별히 깊은 흔적을 남긴다. 실패, 거절, 배신, 수치심, 부당한 평가, 책임을 혼자 떠안았던 경험은 인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현실을 방어적으로 볼 수 있다. 비슷한 상황이 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위험을 먼저 보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의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상처의 인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비합리성이 아니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 된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인식 전체를 지배하면 사람은 현재를 현재로 보지 못한다. 그는 과거의 사건을 반복해서 현재에 투사한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현실을 경계하는 그 행위가 새로운 관계와 가능성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상처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상처만으로 현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성공도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

실패와 상처만 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도 인식을 왜곡할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은 그 방식을 현실의 보편적 원리로 생각하기 쉽다. 자신이 경험한 성공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성공은 자신감을 주지만, 그 자신감이 지나치면 새로운 현실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한다.

조직에서도 성공 경험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이전에 효과적이었던 전략, 잘 작동했던 관리 방식, 성공을 만든 평가 기준은 쉽게 절대화된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면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 이상 맞지 않을 수 있다. 성공 경험이 강한 조직일수록 변화에 둔감해질 수 있다. 성공이 자산이기는 하지만 성찰되지 않은 성공은 인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경험은 언어와 결합한다

경험은 언어와 결합하여 더 단단한 인식이 된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특정한 말로 정리한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성과는 압박해야 나온다”, “책임지면 손해 본다”, “실패는 숨겨야 안전하다”, “기회는 빨리 잡아야 한다”와 같은 말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 언어로 굳어진 결과이다. 이렇게 굳어진 언어는 이후의 인식을 이끈다.

언어화된 경험은 반복될수록 신념이 된다. 그렇게 신념이 된 경험은 새로운 현실을 해석하는 기준이 된다. 문제는 그 신념이 언제나 현실에 맞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경험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유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것을 일반 원리로 확대한다. 그래서 경험을 성찰하려면 자신이 경험을 어떤 언어로 정리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경험 자체보다 경험을 해석한 언어가 더 오래 사람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은 타인의 현실을 이해하게 한다

경험은 인식을 좁히기도 하지만 넓히기도 한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타인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책임을 맡아본 사람은 책임자의 부담을 이해하고, 실행의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현장의 조건을 이해한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을 쉽게 단정하지 않고, 부당한 평가를 경험한 사람은 평가받는 사람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이 타인을 이해하게 하려면 자기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이렇게 극복했으니 너도 그래야 한다”는 태도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경험을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는 것이다. 성숙한 경험은 타인의 경험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타인을 향해 열리되, 타인의 경험을 자기 경험으로 덮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경험의 흔적을 성찰해야 한다

인식이 깊어지려면 경험의 흔적을 성찰해야 한다. 나는 어떤 경험 때문에 이 현실을 이렇게 보는가. 어떤 실패가 나를 지나치게 조심하게 만드는가. 어떤 성공이 나를 지나치게 확신하게 만드는가. 어떤 상처가 타인의 의도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만드는가. 어떤 언어가 내 경험을 고정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은 경험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경험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경험을 지울 필요도 없다. 경험은 인간을 형성하고, 세계를 이해하게 하며, 행동의 지혜를 제공한다. 다만 경험이 현재의 현실을 완전히 대신해서는 안 된다. 경험은 현실을 해석하는 자원이어야지 현실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험의 흔적을 자각할 때 인간은 과거에 묶이지 않고 현재를 더 책임 있게 볼 수 있다.

경험은 인식에서 의식으로 이어진다

경험은 인식의 조건이지만, 동시에 의식의 재료가 된다. 사람이 어떤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그의 내면 기준이 형성된다. 실패를 통해 책임을 배우는 사람도 있고, 실패를 통해 회피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인정의 경험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 사람도 있고, 지나친 인정에 익숙해져 비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경험은 그 자체로 사람을 결정하지 않는다. 경험을 어떻게 의식으로 받아들이는가가 중요하다.

제1장에서 인식은 현실을 구성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현실 구성의 깊은 바탕에는 경험이 있다. 인간은 경험의 흔적 위에서 세계를 보고, 그 흔적을 통해 현실에 의미를 붙인다. 그러므로 인식을 이해하려면 경험을 이해해야 한다. 경험을 성찰하지 않는 인식은 과거의 반복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경험을 성찰하는 인식은 의식의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다. © shik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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